불수진(拂鬚塵)과 관리(官吏)
중국 북송(北宋)시대의 3대 황제인 진종(眞宗) 때 구준(寇準)이라는 재상이 있었다.
그는 성격이 강직하고 청렴했을 뿐만아니라 뛰어난 인재가 있으면 항상 조정으로 불러들여 능력을 발휘할 기회를 제공해 사람들의 신망이 두터웠다.
당시 참정 벼슬을 하던 정위(丁謂)도 구준의 인정을 받아 벼슬길에 나간 사람이다.
그런데 정위는 위인이 간교하고 비굴하여 항상 아첨이 심했다.
더구나 자신을 천거했던 구준에 대한 아부는 그 도가 지나쳤다.
하루는 구준이 정서성에서 관리들을 보아놓고 회식을 하고 있었는데 그 자리에 정위도 참석했다
이때 음식의 찌꺼기가 구준의 수염에 붙었다.
이것을 본 정위는 재빨리 일어나 자신의 소매자락으로 구준의 수염을 공손하게 털어 주었다.
그러자 구준은 웃으면서 “나라의 정무를 보는 대신이 어찌 남의 수염에 붙은 티끌을 털어주는 하찮은 일을 하는 게요?”
이 말에 자신의 행동이 비굴하다는 것을 느낀 정위는 매우 부끄럽게 생각해 반성을 하기는 커녕 자신을 책망한 구준을 미워하기 시작했다.
이와같은 고사에서 나온 말이 털 불(拂)수염 수(鬚)먼지 진(塵)을 써서 윗사람이나 권력자에게 지나치게 아부하는 것을 비유해 불수진이라 한다.
관리(官吏)의 정의에 대해 E.프롬은 자신의 저서 ‘소유(所有)냐 삶이냐’에서 이렇게 정의한다.
일단 살아있는 인간이 하나의 수자로 격하되면 관료주의자는 철저히 잔인한 행동을 할 수 있다.
그것은 그들의 행동에 비례할 만큼의 지독한 잔인성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그들의 대상물에 대하여 아무런 인간적인 연대감도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관료는 사디스트(sadist: 극단적이고 잔학함을 좋아 하는 사람)보다는 덜 포악하지만 더욱 위험스럽다.
왜냐하면 그들은 양심과 의무사이에 아무런 갈등을 느끼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의 양심이란 바로 그들의 의무를 다하는 것이기 때문에 동정과 공감의 대상으로서 인간이란 그들에게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10월15일 용인시청의 젊은 공직자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으로 알려졌다.
이 공직자는 임용된지 5년이 안된 7급 공직자로 공지자들의 선망의 부서인 인사부서에 근무 중이었다.
정확한 동기는 수사기관 등 해당 부서에서 밝혀야 할 것이지만 용인시의 인사문제를 둘러싼 각종 추문으로 인해 최근 감사원에서 내려와 승진서열명부 조작 여부 등 인사비리를 둘러싼 의혹을 감사받던 중 그 억울함을 이기지 못해 스스로 목숨을 버린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이에대해 용인시의회 모 의원은 “용인시 공직사회에선 최근 인사문제를 둘러싸고 의혹에 의혹이 꼬리를 물고 있다.
특정인을 승진시키기 위해, 또는 특정인을 특정 자리에 앉히기 위해 인사의 원칙이 무너지고, 심지어 공문서 위조까지 이루어지고 있다는 의혹이 난무하고 있다”며 “용인시장은 한 점 의혹 없이 명백하게 이 사건의 진실을 밝혀야 한다.
‘시장을 둘러싼 측근들의 구조적 인사비리가 감사에서 적발되자 하위직 공직자에게 그 책임을 덮어씌운 사건’이라는 것이 공직사회의 공공연한 여론이다”고 진상규명 요구와 함께 수사기관의 철저한 수사를 촉구하는 성명서도 내놓았다.
대부분의 지방자치단체의 경우 진급 심사나 보직이동시 사무관(5급)이상은 단체장의 의지에 의해 이뤄지고 있는 것이 관례다.
물론 자체 인사위원회를 가동하고 있지만 단체장의 의지가 반영되는 것이 통상적인 예다.
기초자치단체장이 예산 편성권과 집행, 직원들에 대한 인사권에 대해 갖는 권한은 막강하다.
선거로 선출되는 단체장이므로 선거 때 자신을 도운 공신들에 대한 보은 성격의 인사도 있을 수 있고 자신의 정책 방향을 추종하는 자를 산하기관에 임용할 수도 있으며 경우의 수 이지만 상대방 후보자에 줄을 선 것으로 확인된 직원에 대해 인사상 불이익을 주는 것도 다반사로 벌어지고 있다.
선출직 기초자치단체장 제도가 민의를 받든다는 장점도 있지만 반대급부로 이에 따른 폐해가 속출하고 있는 것도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따라서 기초자치단체장의 경우 정당공천제 폐지와 임명제 도입이 화두에 오르고 있는 것은 어찌보면 제도의 장점보다 단점이 부각되고 있는 현재 당연한 시대적 요청으로 보인다.
이러한 막강한 권한 밑에서 근무하는 직원들은 단체장의 의중을 무시할 수 없다.
그래서 살아온 길보다 살아갈 길이 더 많은 젊은 공직자의 죽음에 대해 아무리 감사원 감사를 받는 중이라지만 자신의 목숨을 버릴 정도로 비리가 심각했었나?라는 의혹이 꼬리를 무는 이유가 반드시 밝혀져야 할 것이다.
대개 자살은 자신의 결백을 증명하게 되는 유일한 도구로 사용되는 사례가 많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죽음으로 항변한 사유가 밝혀져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특히 인사주무 부서장들과 단체장간의 커넥션에 대해 말 못할 사유가 있었는지 그 동기를 밝혀내는 것도 젊은이의 죽음을 헛되게 하지 않는 하나의 방법일 것이다.
담당자들의 불수진(拂鬚塵)이 밝혀질까 우려해 입을 닫은 것은 아닌지?
용인시 담당자들의 행보가 북송 때의 정위라는 인물과 교차되지 아니하고 E.프롬이 “관료는 사디스트보다는 덜 포악하지만 더욱 위험스럽고 그들은 양심과 의무사이에 아무런 갈등을 느끼지 않으며 그들의 양심이란 바로 그들의 의무를 다하는 것이기 때문에 동정과 공감의 대상으로서 인간(死者)이 그들에게 존재하지 않는 다”는 명구를 용인시가 상징적으로 대변하는 관료(행정)기관으로 역사에 남겨지기 않기 위해서도 죽은 자의 몫은 산자가 반드시 풀어야할 숙제로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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